북리뷰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

주삼부칠 2024. 7. 20. 15:28

토머스 제퍼슨은 1803년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사들여 국토를 두 배로 늘렸다. 그 뿐만 아니라 미국은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플로리다를 사들였고, 1845년에는 텍사스를, 1846년에는 오리건을 합병하였으며, 1850년에는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캘리포니아까지 국토에 추가했다. 미국은 1867년에 알래스카, 1898년에 하와이를 추가하면서 국토 확장을 마무리 지었다.

 

앵거스 매디슨에 따르면 예수 탄생부터 1820년 무렵까지 경제성장률은 연 기준으로 0.11퍼센트, 세기 기준으로는 11퍼센트에 불과했다.

 

18세기 영국에서 '비즈니스 맨'은 공직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반면 1830년대 미국인들은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가리킬 때 '비즈니스맨'이라는 말을 썼다. 이후 미국인은 영국인이 신사를, 프랑스인이 지식인을, 독일인이 학자를 바라보는 존경스러운 시선으로 사업가를 바라보았다. 알렉시 드 토크빌이 말한 대로 '상업에 영웅적인 측면을 부여하려는' 미국의 태도는 사업가를 떠받드는 풍조를 낳았다. 미국인은 역사적 변화를 일으키는 진정한 동력원은 마르크스가 주장한 노동자나 다른 경제학자들이 시사하는 추상적인 경제적 힘이 아니라, 1,093건의 특허를 보유한 토머스 에디슨 같은 발명가나 헨리 포드, 토머스 왓슨, 빌 게이츠 같은 창업자들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사람이라는 조지프 슘페터의 생각을 본능적으로 지지했다.

 

창조적 파괴라는 개념은 조지프 슘페터가 쓴 탁월한 저서인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1942)에서 나왔다.

 

1794~1796년까지 미국을 여행한 프랑스의 뛰어난 외교관 텔라랑은 낙후된 미국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의 글에 따르면 미국은 "제조 부문에서 아직 갓난아이 수준으로 소수의 철공소와 유리 공장, 가죽 공방, 다수의 하찮고 불완전한 커지미어kerseymere(거친직물) 공장, 일부 지역에는 면직 공장이 있을 뿐이다. 이런 실정은 지금까지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생산하기 위해 이 나라가 기울인 노력이 얼마나 미미한지를 말해준다.

 

미국인 가운데 90퍼센트 이상은 시골의 소규모 또는 대규모 농장에서 살았다. 인구가 1 6천 명 이상인 도시는 필라델피아, 보스턴, 뉴욕뿐이었는데, 이 세 도시도 런던(75만명)이나 베이징(거의 300만명)과 비교하면 미미한 수준에 불과했다.

 

1620, 런던 파리 니스의 인구가 30만 명을 넘지 않던 시기에 베이징의 인구는 100만 명을 넘어섰다.

 

미국의 첫 인구조사는 건국 직후인 1790년에 이뤄졌다. 제조업과 농업에 대한 자료는 1840년에 이르러서야 수집되기 시작했다. 스탠퍼드 대학의 폴 데이비드는 1840년 이전 시기를 '통계의 암흑시대'라 불렀다.

 

인구는 인구조사를 처음 실시한 1790년에 390만 명이었다가 1860년에는 3,150만 명으로 늘어났다.

 

2010년에 실시한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영국을 비롯한 다른 어떤 나라보다 독일에 뿌리를 둔 미국인이 많았다.

 

가장 높은 가치를 지닌 '바다 동물'은 어류가 아니라 포유류혔다. 고래 기름에 대한 수요는 끝이 없어서 주요 포경 기지인 매사추세츠주 뉴베드퍼드의 포경업은 1817~1892년까지 연평균 14퍼센트의 수익을 남겼다. 이 지역에 본거지를 둔 포경 조합인 기디언 앨런 앤드 선스는 고래잡이 항해에 필요한 자금을 대줌으로써 19세기 대부분의 기간에 걸쳐 연간 60퍼센트의 수익을 올렸다. 이는 미국 역사상 최고의 실적에 해당한다.

 

1864년 뉴욕시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월가와 브로드웨이에 있는 트리니티 교회였다.

 

뉴욕의 그랜드 센트럴역, 시카고의 유니언역, 워싱턴 DC의 유니언역은 모두 증기기관을 위한 대리석 사원이었다. 철도는 당시 번영을 낳는 최고의 수단이었다.

 

1870 38만 톤에 불과하던 강철 생산량은 1913년에 2,840만 톤으로 늘어났다. 미국은 강철 분야에서 커다란 경쟁우위를 지니고 있었다. 우선 모든 생산요소가 땅에 묻혀 있어 운송 인프라가 구축된 뒤에는 비교적 저렴하게 모을 수 있었다.

 

제철 혁명은 생산지도 바꾸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클리블랜드, 베들레헴, 시카고, 버밍엄, 영스타운이 철강 동네가 되었다. 피츠버그는 철강 도시가 되었다.

 

미국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저렴한 석유를 발판으로 삼아 성장했다. 미국인들은 자동차에 저렴한 연료를 채울 수 있었기 때문에 도시에서 먼 교외에 살 수 있었다. 또한 연료가 풍부했기 때문에 넓은 주택을 짓거나 추운 지역에 주택을 지을 수 있었다. 캘리포니아는 저렴한 연료를 바탕으로 문명을 건설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사람들은 인접성보다 넓은 공간을 선택했다.

 

카네기는 영국보다 많은 철강을 생산했다.

 

주식을 일반인에게 판매하는 중개 사무소의 수는 1925 706개였다가 1929년 말에는 1,658개로 급증했다. 일일 거래 물량은 1925년에는 170만 주 1928년에는 350만 주, 1929 10월 중순에는 410만 주로 늘었다

 

소프 오페라 soap opera는 중독성 강한 라디오 프로그램

 

1930년대에 한때 어려움을 겪은 기업이 비용을 줄이고 새로운 기회를 잡기 위해 노력하면서 경영학이 크게 발전했다. 1933년 하버드 대학 로스쿨과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젊은 교수인 마빈 바우어Marvin Bower는 시카고 대학 교수 출신으로 회계사와 엔지니어가 모인 회사를 세운 제임스 맥킨지James McKinsey를 우연히 만났다. 바우어는 미국에 실패한 기업을 되살리는 방법을 아는 전문가(은행가, 변호사, 회계사 등)는 많지만 애초에 실패를 예방하는 방법을 아는 전문가는 드물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맥킨지에게 회사에 새로운 종류의 경영 컨설턴트를 추가하라고 설득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난쟁이들 사이의 거인으로 부상했다. 세계 인구의 7퍼센트가 사는 나라가 전 세계 제조품의 42퍼센트, 전력의 43퍼센트, 철강의 57퍼센트, 석유의 62퍼센트, 자동차의 80퍼센트를 생산했다.

 

빌게이츠는 1975년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에서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했고,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은 1976년 애플을 설립했다

 

레이건이 취임할 때 951포인트였던 다우지수가 수년 뒤 2,239포인트까지 오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미국은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이 주도한 PC 혁명에 이어 인터넷 혁명을 일으키면서 하이테크 경제의 중심이 되었다. 다우지수는 경기가 호황을 구가하고 일반 국민이 은퇴 자금을 예금에서 주식으로 옮기면서 클린턴 임기 내내 고점을 찍었다. 1995 11월 1999 3월까지 다우지수는 5천포인트에서 유례가 없는 1만 포인트가지 올랐다

 

클린턴이 마침내 누린 경기 호황을 이끈 것은 1970년대부터 이뤄진 창업 정신의 부활,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규제 완화, 세계화의 진전, 하이테크 혁명이라는 네 가지 중대한 변화였다.

 

프레드 스미스는 너무나 통념에 어긋나서 처음 사업 구상을 제시했을 때 예일대 교수가 C학점을 준 사업계획(모든 화물을 중앙 물류센터로 모은 다음 최종 목적지로 발송)을 토대로 페덱스라는 운송회사를 만들었다

 

터프츠 대학의 아마르 비데는 '모험적 소비'도 미국의 창업 정신을 촉진했다고 주장했다. 미국인들은 새로운 기술을 익히거나 저금을 털어야 한다고 해도 온갖 신제품을 써보려는 다른 의욕을 갖고 있었다. 애플은 어려운 시기를 버티게 해준 수많은 열혈 팬을 거느렸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대단히 큰 인기를 끈 복합기업은 한 분야씩 차례로 시장을 빼앗는 해외 경쟁 업체에게 창피를 당했다

 

미국이 IT 혁명에서 그토록 지배적인 역할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컴퓨터 혁명은 군산복합체부터 대기업, 학계, 컴퓨터 동호회까지 다양한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미국은 애초에 이 다양한 세계를 만들어내고, 그들을 창의적인 공생 관계로 통합하며, 거기서 나온 아이디어를 상업화하는 세 가지 일을 잘해왔다.

 

미국은 세계 20대 대학 가운데 15, 전 세계 창업 투자 자본의 60퍼센트 이상이 있는 곳이다

 

스탠퍼드 대학의 라즈 체티는 납세 기록을 폭넓게 조사한 뒤 같은 나이였을 때의 부모보다 더 많은 소득을 올리는 30세 미국인의 비율이 40년 전에는 86퍼센트였다가 지금은 51퍼센트가 되었다고 밝혔다

 

16세기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실크 스타킹을 가질 수 있었다. 자본주의는 가난한 여공도 그 스타킹을 신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조셉 슘페터 Joseph Schumpeter

 

유럽 최대 도시(런던, 파리, 니스)의 인구가 30만을 넘지 않던 시기에 베이징의 인구는 100만 명을 넘어섰다.

 

사람은 누구나생명, 자유, 행복 추구에 대해 빼앗을 수 없는 권리를 지닌다라는 토머스 제퍼슨의 말은 존 로크의 말에 대한 주석이었다. 로크는 <통치론 제2논고 Second Treatise of Government>에서 사람은타인에 의한 관리 침해와 위해로부터 자신의 생명과 자유 그리고 재산을 지킬 권리를 타고난다고 밝혔다.

 

미국 최초의 공회commonwealth는 주주총회였다. (공회 : 공적인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열리는 모임)

 

미국은 독립전쟁 이후 일직선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이 신생 공화국은 미래를 바라보는 두 개의 다른 관점으로 분열되었다. 하나는 자작농을 중심으로 하는 분권적 농업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토머스 제퍼슨의 관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공장이 경제성장을 이끌고 은행이 경제성장을 뒷받침하는 도시 중심 공화국이 되어야 한다는 (놀라운 선견지명을 담은) 알렉산더 해밀턴의 관점이었다.

 

미국의 국토는 방대한 천연자원을 품고 있었다. 항해 가능한 미국의 하천은 나머지 세계 전체를 합한 것보다 더 길다.

 

1890년 무렵 뉴욕 시민의 80퍼센트는 이민자이거나 이민자의 자녀였다. 시카고의 경우 비중이 무려 87퍼센트였다. 미국의 기업계 영웅 가운데 이민자 내지 이민자의 자녀가 차지하는 비중은 놀랄 만큼 높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과 앤드류 카네기는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다. 교류 전류를 발견한 니콜라 테슬라는 세르비아 사람이었다.

 

1905년 기준으로 세계 철도 연장의 14퍼센트가 미국의 단일 도시인 시카고를 지나갔다.

 

1600~1766년까지 식민지 미국은 세계 최고의 성장률을 기록하면서 모국인 영국보다 두 배나 빨리 성장했다. 또한 모국과 결별할 준비가 되었을 무렵, 미국인들은 2017년 달러 기준으로 1인당 하루 평균 4.71달러의 가치를 생산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은 유럽인보다 키가 5~7센티미터 더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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