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주식의 역사

한국 주식시장의 역사

주삼부칠 2024. 8. 22. 23:27

한국 주식시장의 역사
 
한성순보(漢城旬報)
 
한국의 주식거래는 언제부터였고 최초의 주식회사는 어느 회사였을까?

한국 주식시장의 역사를 알기위해 자료를 찾아가다보면 우리나라의 최초 근대적 신문으로 평가받는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먼저 만나게 된다.
* 한성순보의 순보는 한달에 3회, 즉 열흘에 한번씩 발간한다하여 열흘 旬자를 사용하여 순보가 되었음

1883년 10월 1일(음력), 현재의 서울시장이라 할 수 있는 당시 한성부판윤이였던 박영효의 건의로 설립된 박문국에서 발간한 한성순보 3호를 보면 '회사'라는 시스템의 도입 필요성을 주장하는 글이 실려있다.


요즈음 서양 제국에서는 모두 회사를 설립하여 상인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데, 이는 실로 부강의 기초라 하겠다. 동방의 상인들은 지금까지 4,000여 년을 지내 오는 동안, 단지 한 사람 단독으로 무역하고 바꿀 줄만 알았지,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 경영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상업이 성하지 못하고, 나라 형세가 떨치지 못한 지가 오래였다. 그러나 서양은 그렇지 않아서 한 사람 혼자 힘으로 무역할 수 없으면 반드시 10명이 하고, 10명의 힘으로도 되지 않으면 반드시 100명, 1000명이 함께한다. 그래서 크고 작은 일이 성사되지 않음이 없다.
 
대저 회사란 여러 사람이 자본을 합하여 여러 명의 농공(農工)⋅상고(商賈)의 사무를 잘 아는 사람에게 맡겨 운영하는 것이다. 지금 서양 제국에는 바다에 화륜선이 달리고, 육지에는 화차(火車)가 달리며, 전선을 설치하고 가로등을 켜 그 조화를 무엇이라 이름 지을 수가 없다. 그 대요는 사해(四海)에 출병(出兵)시켜 만국과 통상을 하여 천하에 부강을 떨치고 이웃 나라에 위엄을 보이는 것이 고금 이래로 없던 일이다. 이런 일은 모두 회사가 설립된 이후부터 있게 되었다.

...

이제 회사 규칙 5조항을 다음에 적어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제공한다.
 
고표(股票)를 발매하는데, 만일 회사의 자본금으로 1만 냥이 필요하면 1장의 정가가 10냥짜리 고표 1,000장을 만들어 세상 사람들이 마음대로 와서 매입하게 하는데, 고표를 사는 사람을 사원이라 한다.
 
.. 또 다른 종류의 회사에서는 이런 것이 있다. 몇 사람이 스스로 자본을 내어 회사를 세우고 사원 모두가 회사 일을 맡는 제도이다. 혹 몇 사람이 낸 자본이 회사의 자본금에 미달하면 반드시 표권(票卷)을 발행하여 판매해 그 액수를 채운다. 사원과 표권을 산 사람은 매년 이익을 나누고, 또 본전은 몇 년 안에 갚는데, 만일 1,000장의 표(票)의 본전을 20년 안에 갚는다면 매년 추첨을 하여 당첨자에게 50장의 본전을 갚아 퇴사(退社)하게 한다. 그러면 이런 회사는 20년 후면 몇 사람의 소유가 된다.

 ...

처음으로 회사를 설립하고자 하는 자는 주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광고하여 동지를 얻는다. (광고라는 단어도 여기에서 첫 등장)
 
『한성순보』 제3호, 1883년 11월 20일, 「회사설」


 
1883년에서 1894년 갑오개혁까지의 시기에 회사를 설립한 사람들은 대부분 객주나 여각을 운영하던 상인들이나 일반 상민들이었다. 객주나 여각이 설립한 회사는 일종의 동업조합(同業組合) 형태를 띠고 있었으며, 일반 상민들이 설립한 합자(合資)회사도 전통적인 계(契)의 형식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조선에 근대적인 주식회사 형태를 갖는 회사가 등장하는 것은 갑오개혁 이후의 일이다.

 

조선은행
 
우리나라의 최초 주식회사는 1896년 설립된 조선 최초의 은행인 조선은행이다.

 

조선은행 이후 주식회사의 설립이 본격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하는데, 대표적으로 한국 최초의 철도인 서울에서 부산을 잇는 경부철도가 바로 당시 조선과 일본의 투자자들로부터 투자금을 공모하여 추진된 사업이다.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 또한 이러한 주식공모를 통해 설립되게 되었다.
 
참고로 경부철도의 자본금은 2,500만원(현재의 수천억원 수준)이였고, 1903년 주주명부에는 조선에 거주하는 주주가 564명이였는데 이 중 500주 이상을 보유한 대주주는 대한제국 황실과 민씨 일족이였다고 한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주권

 
이렇게 주식회사가 등장하고,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게되며 조선에는 더욱 많은 일본이들이 거주하고 상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현재의 명동 자리에 많은 일본인들의 전당포와 양복점들이 들어섰고 사람들이 점차 모여들게되면서 자연스레 부동산 중개업과 음식점 등의 상권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후 1906년에는 조선통감부가 들어서며 일본인들은 본격적으로 조선을 이른바 Emerging Market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조선에 있는 회사들의 주식을 매매하게 되었다.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京城株式現物取引所)
* 여기서 취인(取引)은 일본어로 거래라는 뜻
 
이렇게 주식거래가 활성화되자 개별적으로 주식을 거래하는 주식현물상이 생겨나게 되었고, 1911년에는 이들이 모여 주식매매업자 조합이 결정되기도 하였다. 1914~1918년 제1차 세계대전과 함께 전세계적인 주식붐이 일었는데 이는 조선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중화학공업과 해운업 회사들의 공모가 확대되고 미쓰이물산, 조선방직과 같은 기업들의 주식이 인기를 끌었다.
 
1918년 조선식산은행은 일본과 조선에서 함께 공모하였는데 당시 경쟁률이 295대 1까지 치솟았고, 전체 주주 8천명중에서 조선에 거주하는 사람이 5천명이였고, 조선인은 2천명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렇게 주식 시장이 확대되어가자 1919년 17명의 발기인이 경성주식취인소 설립을 신청하고 인가받았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주식거래소가 된 배경이다.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

 
 

◇참고자료
 
한국주식시장의 기원-개항기에서 1950년대까지, 이명휘, 2022.5, 역사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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