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311개의 매장, 15,417명의 임직원1과 함께하고 있는 에르메스(Hermes)는 2019년 기준 €281 billion(약 365조원)의 기업 가치를 지닌 명품(Personal luxury goods) 기업이다.
에르메스의 설립자인 띠에리 에르메스(Thierry Hermes)는 프랑스계 아버지와 독일계 어머니 사이에서 1801년 독일 서부의 Krefeld 지역에서 태어났다.
에르메스는 1828년 가족과 함께 파리로 이주하여 1837년에 에르메스를 설립하였다. 에르메스는 처음부터 일반인 대상이 아닌 프랑스 귀족과 부유층들을 상대로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에르메스의 주요 판매품은 바로 마구(馬具, harness) 였다. 20세기 자동차가 본격적으로 대중화되지 전까지 사람들의 교통수단은 말(馬)과 마차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말과 관련된 제품과 수요가 많은 시기였기 때문이다.
띠에리 에르메스의 가업은 1880년 그의 아들인 샤를-에밀 에르메스(Charles-Emile Hermes)가 이어받았다. 그는 위치를 파리 포부르 생토노레 24번가(24 rue du Faubourg Saint-Honore)로 옮겼는데 이 곳에서는 아직도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에르메스 매장이 영업 중이다.
과거모습 현재모습 샤를-에밀 에르메스는 고객들로부터 마구와 안장(bespoke harnesses and saddles)을 주문받아 맞춤형으로 제작하였다. 부유층일수록 남들과 같은 것 보다는 비싸더라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원하는 요구에 맞춘 것이다.
샤를-에밀은 사업을 확장시키기 위해 프랑스에 한정되어 있던 에르메스의 고객을 유럽, 러시아, 북아프리카 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미국까지 확대하였고, 제품 측면에서도 안장을 넣고 다닐 수 있는 오따꾸르와 가방(Haut a Courroies bag)을 제작하며 말(馬)과 관련된 액세서리에서 가방까지 제품 포트폴리오를 넓혀갔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에르메스는 다시 한번 세대교체를 하게 되는데 1902년 샤를-에밀 에르메스의 아들인 아돌프 에르메스(Adolphe Hermes)와 에밀-모리스 에르메스(Emile-Maurice Hermes)가 물려받게 된다.
이와 같이 형제가 운영하게 되면서 이 시기에는 에르메스를 에르메르 프레레스(Hermes Freres ※ Freres는 불어로 Brothers라는 뜻)라 부르기로 하였다. 1914년에는 당시 러시아 황제를 위한 말의 안장을 제작하였기도 하였는데 당시 에르메스는 80명이 넘는 안장 장인(匠人, craftsmen)을 보유하고 있었다.
1922년 에밀-모리스는 미국이 특허권을 가지고 있던 지퍼(zipper) 기술에 대한 독점 사용권을 프랑스 최초로 획득하여 제품에 활용하였는데 당시 웨일스의 에드워드 왕자에게 지퍼가 달린 골프 가죽 자켓을 전달하기도 하였다. 에르메스가 이렇듯 새로운 기술을 적극 도입하고 또한 이에 대한 독점권까지 확보하는 모습은 에르메스의 성장이 단순히 부유층들에게 값비싼 제품을 판매하는 것에 있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현대 경영에서 중시하는 오픈 이노베이션(Open Innovation)의 대표적인 사례가 IT 기업이 아닌 100년전의 가방 제조업체가 실행하고 있었던 점은 매우 놀라워 보인다. 에르메스가 이렇듯 오픈 이노베이션 뿐만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대응하는 모습도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최고의 위치를 지킬 수 있는 이유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당시 세계는 1885년 벤츠에서 최초의 내연기관 자동차가 출시된 후 1908년에는 자동차 대중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포드의 모델 T가 나오면서 본격적인 자동차의 시대가 열리기 된다. 에르메스는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마구와 안장에 집착하지 않고 1922년 가죽 핸드백, 1929년 고급 여성옷(couture), 1935년 싹아데페쉬 백(Sac a depeches bag), 1937년 정사각형 스카프인 에르메스 까레(Hermes carres) 그리고 1928년에는 샹달 팔찌(Chaine d’ancre bracelet)와 승마복 등으로 사업을 적극적으로 다각화 하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모습일 수 있으나 스마트폰 시대에 대처하지 못한 노키아(Nokia)나 디지털 카메라 기술을 최초로 개발하고도 필름 사업에 집착해 파산한 코닥(Kodak)의 사례를 보면 이러한 사업변화가 결코 쉽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에르메스 카레 스카프는 미국의 35대 대통령인 존 F. 케네디의 영부인인 재클린 케네디의 사랑을 받으며 크게 유명해지면서 현재까지도 에르메스의 대표 제품을 자리매김하고 있다.
1930년대 중반에는 스위스의 시계 장인을 고용하여 에르메스 브랜드의 시계를 선보였고 1949년에는 향수 사업도 시작하게 되었다.
Men's wrist Chronograph Women's Art Deco cuff watch 에밀-모리스는 당시의 에르메스의 철학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하였다. "Leather, Sport, and A tradition of refined elegance(가죽, 스포츠 그리고 세련된 우아함)" 에밀-모리스의 에르메스는 1951년 로베르 뒤마 에르메스(Robert DumasHermes)의 시대로 이어진다.
로베르 뒤마는 에밀-모리스의 딸인 재클린 에르메스 (Jacqueline Hermes)의 남편이다. 로베르 뒤마가 비록 에르메스 가문의 직계 후손은 아니지만 여러 측면에서 에르메스의 역사에 남을 업적을 세운 것으로 평가받는다. 우선 에르메스 로고와 에르메스의 시그니처인 오렌지색 종이 박스가 바로 이 시기에 탄생되었다.
또한 에르메스 역사상 가장 유명한 히트작 중의 하나인 켈리백이 탄생한 것도 로베르 뒤마 시절이었다. 1956년 모나코의 공주였던 그레이스 켈리(Grace Kelly)가 자신의 임신을 감추기 위해 배를 가렸던 싹아데페쉬 백(Sac a depeches bag)이 라이프紙(Life magazine)에 실리면서 이 가방은 캘리백(Kelly bag)으로 불리며 에르메스의 상징과 같은 인기를 끌게 되었다.
1978년 5대 회장으로 취임한 장-루이 뒤마 에르메스(Jean-Louis Dumas Hermès) 또한 여러가지 면에서 에르메스의 성장을 이끈 인물이다.
에르메스 콜렉션에 파이썬 모터사이클 자켓(python motorcycle jacket)과 타조 가죽으로 만든 진(jean)을 추가하였고 1979년에는 청자켓을 입은 젊은 모델이 에르메스 스카프를 두른 혁신적인 광고를 선보이기도 하였다.
1980년대에는 식기류(tableware)를 에르메스의 주요한 사업부문이 되기도 하였다.
1990년에는 3만개가 넘는 제품 종류를 가지게 되었는데 자기(磁器, porcelain)와 크리스탈이 새로운 소재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1993년에 에르메스는 파리 증시에 상장하였는데 당시 에르메스 일가는 주식의 80%를 소유하고 있었다. 당시 U.S. News & World Report는 에르메스를 가리켜 '파리 최고의 수호 보석 중의 하나(one of Paris' best guarded jewels)'로 표현하였다.
그 후 뒤마는 250개였던 프랜차이즈 매장을 200개로 줄이고 직영점을 60에서 100개로 들리면서 에르메스 매장의 제품 품질관리와 고급화 전략을 추진하면서 1996년에는 베이징에 진출하게 된다. 그리고 2000년에는 뉴욕 Madison Avenue, 2001년 도쿄 긴자 그리고 2006년에는 서울의 도산공원에 메종 에르메스(Maison Hermes, 에르메스 플래그쉽 스토어)을 오픈하였다.
2006년부터는 장-루이 뒤마스의 뒤를 이어 6대 회장으로 패트릭 토마스가 취임하였는데 그는 에르메스 역사상 최초로 에르메스家 아닌 외부 영입 CEO였다. 패트릭은 에르메스의 메티에(metiers, 장인정신)를 잃지 않으면서 에르메스 구조를 보다 전문화하였다. 선대회장의 아들인 피에르-알렉시스 뒤마(Pierre-Alexis Dumas)를 아트 디렉터로 임명하였다.
2013년부터 현재까지 에르메스를 이끌고 있는 악셀 뒤마(Axel Dumas)는 2014년에 상하이에 5번째 메종 에르메스를 오픈하였고 2018년부터 에르메스의 디지털화에 주력하며 에르메스를 이끌고 있다. 에르메스는 좀처럼 위기를 겪지 않는 기업이다. 금융위기가 있었던 2008년~2009년조차 8%~9%의 성장을 기록했을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