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2006-04-23)
“지난해와 똑같은 주제의 경영 컨설팅을 또 맡아 달라고요?”
미국에서 경영대학원(MBA)을 나와 국내에서 경영 컨설턴트로 활동하고 있는 A(40)씨는 국내 대형 소비재 업체의 신규 사업 전략 컨설팅을 10년째 맡고 있다. 그 동안 같은 보고서를 수도 없이 냈지만 이 회사가 정작 신사업에 진출한 것은 단 한 건도 없다. A씨는 “사내 논객들만 늘어가고 정작 어려운 일에는 발 벗고 나서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신사업에 진출할 수 있겠느냐?”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이러한 대기업병은 인지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기업에겐 가장 위협적인 병”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주요 기업들의 대기업병이 이미 심각한 수준을 보이고 있다. 특히 기업 규모가 클수록 병세도 중해 이를 치유하기위한 일대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사업부문별 반목과 이기주의가 문제점으로 거론되고 있다. 지난해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 사업부문이 37인치 액정화면(LCD) TV를 내놓은 것이 단적인 사례다. 당시 세계 LCD TV 시장은 37인치로 대표되는 LG전자, 필립스, 도시바, 샤프 등의 6세대 진영과 40인치를 주력으로 하는 삼성, 소니 등의 7세대 진영이 세계 표준을 놓고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이때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 사업부문이 사내 LCD 사업부문의 전략에 발 맞추기 보단 경쟁 진영의 사이즈를 내놓아 전열을 약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벌어지게 된 배경은 삼성전자 LCD 총괄이 소니에 LCD 패널을 팔며 제 식구인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 총괄보다 더 낮은 가격에 공급,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 총괄이 타격을 입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 사업부문의 핸드PC 겸 개인정보단말기(PDA)인 ‘넥시오’가 고전하게 된 것도 사업부문간 경쟁의 희생양이라는 게 업계 시각이다. 디지털미이어 사업부문은 2003년 넥시오를 내면서 당시 삼성전자 정보통신 사업부문에 통신 모듈 기술과 연구 인력 등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핸드폰을 생산하고 있는 정보통신 사업부문은 잠재적 경쟁 제품이 될 수 있다며 이를 거부했다. 결국 디지털미디어 사업부문은 이듬해 넥시오를 단종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내부 불협화음은 회사조직이 너무 비대해져 사업부문간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긴 결과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현대ㆍ기아차가 비자금 조성의혹 등으로 유례없는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은 그룹내 비판의 목소리나 외부 지적에 귀를 닫아 ‘안테나 기능’이 마비된 데 따른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LG그룹의 경우 2000년대초 카드사태로 금융부문을 접어야 했던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다. 당시 LG카드는 길거리 회원 모집 등을 통해 회원수를 늘리는 등 무리한 공격경영으로 업계1위를 차지하면서 그룹 최고경영진들로부터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칭찬받았다. 하지만 그 후 카드대란으로 금융시장이 동맥경화에 걸리면서 대규모 부실채권을 양산, 카드사업은 물론 증권 등 금융사업을 매각해야 했다. 고객의 돈을 관리하는 금융산업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채 대기업 특유의 무리한 외형경쟁을 벌였다가 어려움을 당한 케이스다.
두산과 한진그룹이 형제간 분쟁으로 이전투구를 벌이게 된 것도 그룹의 몸집이 커지며 형제간에 서로 협력하던 초기의 화합정신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코오롱은 제 때 구조조정을 못해 성장정체에 시달리고 있다. 이동통신사업(신세기통신)에서 철수한 코오롱은 그 후 유통, 정보통신등에서 신성장 사업기회를 찾았으나, 총수의 리더십 부재와 의사결정 지연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기업병을 방치할 경우 한국 경제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세계 최대 자동차 기업인 GM이 대기업병으로 휘청거리면서 지난해 미국 경제는 적잖은 영향을 받았다. 1995년 당시 대기업병으로 허덕이던 도요타자동차 수장에 취임한 오쿠다 히로시 사장이 개혁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일본은 아직도 10년 불황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히로시 사장은 당시 연공 서열제를 폐지하고 사내 벤처 육성 및 해외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자문위원회 설립 등을 통해 도요타의 글로벌 스탠더드화를 밀어붙였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는 “선진기업과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대기업들이 아직도 구태경영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대기업오너와 임직원들이 초심으로 돌아가 대기업병 극복을 위한 일대 혁신을 벌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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